“…몰라도 괜찮지 않나?” “나는 내 저주가 없어진다면… 아무 일이나 해서 먹고 살 만큼 벌고, 여름에는 물놀이하고, 겨울에는 눈사람을 만들 거야.” “그리고 작은 꽃나무를 오랫동안 키워서 커다랗게 만들고… 가끔 어린애들한테 간식도 좀 챙겨주고!” “난 그렇게 살고 싶은데, 진짜 의미 없지?” “너도 의미를 찾기 전에 그냥 살아보는 건 어때?” “하고 싶은 걸 정말 못 찾으면 나랑 그렇게 살아도 되잖아!”
“그렇게 뭘 남겨야만 의미 있는 삶이야?” “한 사람이 만끽한 즐거움이나 기쁨이, 나눈 슬픔과 가꾸어온 노력이… 뭔가를 남기지 않았다 해서 없던 게 되냐고!” “설령 잊어버리고, 잊혀진다 해도 그것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…!” “…하지만 알겠어. 너는 어머니가 무언가 남기셨기를 바라는 거지….” “그거야. 너의 어머니는 낡은 검 한 자루를 남긴 게 아니라, 너에게 그리움을 남긴 거야.” “그리고 이어서 너의 즐거움이, 너의 기쁨이, 너의 노력이, 너의 명예가!” “모두 너의 어머니가 남긴 것이 될 거야.” “너야말로 성기사가 남긴 검이야.” “…그러니까, 네 어머니가 남긴 것을 아무 의미 없다고 말하지 마.”
내 시간이 끝나지 않았단 건, 내게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것. 해주고 싶은 말이 많아도,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. 그래도, 이걸로 불씨는 전달했다. 엔젠을 죽이지 못 한 건 아쉽지만 너에게 보여줄 수 있었다. 어쩌면, 너라면 그 너머의 영역까지도 도달할 수 있겠지. 장해물이 있다면 부수고 지나가라. 누군가 막아선다면 그 자를 꺾어라. 흩날려 스러지는 낙엽이 되지 말아라. 클랜조차 집어삼킬 수 있는… 사나운 불길이 돼라!
“이곳은 쓰레기들이 모인 지옥이다, 제레미 번스타인.” “깨달아라.” “지옥에서 선(善)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!”
“내가 믿던 정의는 그 옛날에 완전히 부서졌다. 흔적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처참하게.” “지금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정의감 따위가 아니야.”
레이첼은 웃었다. 행복해서가 아니었다.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. 일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단 한순간에 송두리째 파괴돼버렸다.
레이첼은 깨달았다. 삶에 미련이 없던 이유는 복수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.
“미안하지만, 여기선 안 죽어요.” “목숨 구걸은 추한데.” “추하게 살아도 사는 거야.”